고려거란전쟁 흥화진 전투! 거란 2차 침입을 막아낸 양규의 활약!
오랜만에 사극 걸작이 탄생하였습니다. 바로 최수종 주연의 고려거란전쟁이 그것인데요. 영화 같은 스토리와 전개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영국, 일본 등지에서도 믿고 보는 한국 드라마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고려거란전쟁의 인기는 흥화진 전투에서의 양규 장군의 활약으로부터 시작되는데요. 흥화진을 지키는 양규 장군의 활약상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란 2차 침공의 빌미를 준 목종의 폐위
요즘 핫한 대하드라마가 있죠. 바로 고려거란전쟁입니다. 고려거란전쟁 초반이 한창 방영 중에 있는데요. 여기서 흥화진을 지키는 걸출한 명장이 등장합니다. 바로 양규 장군입니다. 한반도에 위대한 장군들을 꼽아보면 아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장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양규 장군은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언제나 열세를 극복하고 기적처럼 승리를 이끈 장수입니다. 포로로 잡혀갈뻔한 수많은 백성들을 구했으며, 퇴각하는 적을 쫓아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인물입니다. 고려를 명망의 위기에서 구한 고려사 최고의 명장 양규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109년 고려 서부 도승검사였던 강조는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왕으로 올립니다. 이것을 계기로 고려의 실세로 등극하였는데요. 이 정변으로 인해 고려는 굉장히 어수선한 상태였습니다.
반면 거란은 송나라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여유를 갖게 되었고, 그 틈을 통해 고려를 정벌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다음 본격적으로 중국 대륙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란의 1차 침공 당시에는 거란과 송나라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에 쉽게 물러갔습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제대로 고려를 침공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거란은 강조가 제멋대로 정변을 일으켰다는 것을 구실로 2차 침공을 해왔습니다. 침공군의 병력규모는 무려 40만명에 달했으며, 거란군이 처음으로 공격한 곳은 강동6주의 최전방인 흥화진이었습니다.
드라마로 보는 흥화진 전투와 양규의 활약
흥화진에는 강조의 뒤를 이어 서북면 도승검사가 된 양규 장군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양규 장군의 병사는 불과 수천 명의 병력뿐이었지만 40만 명의 거란군을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막아내는 엄청난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최전방 진지가 방어에 성공한다는 것만으로도 방어책에는 엄청난 이득이 되며, 반대로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한 손해가 됩니다. 이는 양규 장군의 활약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1) 최전방 요새인 흥화진을 굳건히 지킨 양규
최전방 요새인 흥화진을 끝까지 지킨 덕에 거란 침공군이 둘로 나뉘어 전력이 약화되는 상황을 이끌어 냈습니다. 양규는 끝까지 흥화진을 사수하면서 거란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수호하는 위대한 첫걸음을 떼기 시작하였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와서 작은 진지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자 초조해진 거란의 성종은 군대를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우선 20만 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흥화진 남쪽 무로도에 포진해서 고려 서북면 병력들이 남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 후 자신은 직접 2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실세였던 강조는 무려 30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고려군은 1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2차 전투에서 대패하고 강조도 포로로 잡혔다가 처형당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우리 역사에 있어 최다 병력이 동원된 통주전투였습니다. 통주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고려군의 지휘부는 괴멸되었고, 주력군은 증발해 버렸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의 사상자는 약 3만 명으로 알려졌으나, 지휘부를 상실한 채로 뿔뿔이 흩어진 병력은 더 이상 전력으로 간주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대규모 전투에서 거란을 상대할 전력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통주전투에서 승리한 거란의 성종은 고려군 총지휘관인 강조가 보내는 것처럼 위조한 편지를 흥화진으로 보냈습니다. 내용은 거란에 항복을 권유하는 강조의 명령이었습니다. 무력으로 점령하기 어려우니 교묘한 수작을 부린 것이었습니다.
강조는 비록 통주전투에서 대패했지만, 거란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처형당할 정도로 기개가 있었습니다. 항복 명령을 내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만, 양규는 거짓 편지에 "나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 아니다"라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내보이며 거란의 얄팍한 수작을 뿌리쳤습니다.
비록 주력군이 전멸되었지만 양규를 비롯해 요충지를 지키는 고려의 장수들은 매우 용감했고 유능했습니다. 거란은 고려 수비군의 완고한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끝까지 흥화진과 통주성을 점령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나마 점령한 곳은 곽주성이었고, 거란군은 그곳에 6천 명의 수비군을 남겨 중간 보급 기지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중간 보급기지를 마련한 거란군은 서경을 공격했습니다만 서경 공략에도 실패했습니다.
고려 서북면의 병력은 당시 고려 최강의 정예군이었으며, 그들이 지키는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거란군은 곧장 개경을 점령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하였고, 개경을 향해 남하하였습니다. 고려왕 현종은 이미 개경을 포기하고 멀리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한 후였고, 거란군은 무혈 입성하다시피 개경을 점령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거란의 2차 침공은 성공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며, 고려는 망국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양규 장군의 은밀한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2) 중간 보급기지 탈환으로 거란군 본대 고립
거란 유일한 중간 보급기지였던 곽주성을 기적처럼 탈환하여 거란군 본대를 고립시키고 전쟁 수행능력과 수행 의지를 상실하게 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양규 장군은 단 700명의 병력만 이끌고 흥화진을 나와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렸습니다.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거란군이 포위하고 있었지만 소수의 병력으로 은밀히 움직이는 바람에 거란군은 양규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통주에 도착한 양규는 통주전투의 패잔병 일부를 수습해서 천명의 병력을 보충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몰래 곽주성을 공격해 6천 명에 달하는 거란군을 몰살시키고 곽주성을 탈환하였습니다. 곽주성 탈환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세부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정황상 전면전이 아니라 소수의 결사대를 잠입시켜 몰래 성문을 여는 형태의 유격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곽주성을 고려군이 탈환함에 따라 전쟁의 흐름은 요동치게 되었습니다.
거란은 중간 보급기지를 상실하였으며, 압록강부터 개경까지 거란이 실효지배하는 거점은 전무했습니다. 비록 개경 함락에는 성공하였으나, 고립된 거란군은 이제 본격적으로 숨통이 조여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거란 입장에서는 고려왕이라도 사로잡아야 승전으로 마무리하고 돌아갈 수 있는데, 현종은 이미 전라도까지 피신한 상황이라 추격하기도 여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개경에 머물러 있자니 고려 각지의 병력이 개경 근처로 집결하며,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루한 소모전을 펼쳐야만 했습니다. 결국 거란은 나중에 고려왕이 직접 거란으로 찾아와 친조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형식적인 정신승리로 만족한 채 철수를 결정하였습니다.
3) 수만 명의 포로를 구출한 양규의 활약
철수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공격하여 최대한 적의 전력을 소모시켰고, 포로로 끌려가던 무수히 많은 고려 백성을 구해냈습니다. 하지만 곱게 물러난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의 고려인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현대사회에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더욱 인구가 중요했습니다. 곧 노동력과 국방력을 의미하였으며, 수만 명이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은 고려에게 있어 크나 큰 손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곽주성을 탈환하여 거란군을 철수하게 만들었던 양규 장군의 활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011년 1월 18일 양규는 불과 1,700명의 병력만 이끌고 무려 20만 명의 거란군이 주둔하던 무로대를 기습해 2천 명의 적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있던 고려인 3천 명을 구출했습니다.
그다음 날인 1월 19일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고, 성령까지 후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거란군 2,500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인 1천 명을 구출했습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월 22일 열리참에서 다시금 후퇴하는 거란군을 공격해서 천명의 적을 죽이고 포로 1천 명을 구출했습니다.
이날 하루에 3번의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였으며, 다시 위치를 이동하여 1월 28일 애전에서 후퇴하는 거란군의 선봉과 전투를 벌여 1천 명의 적을 죽였습니다. 당시의 지명들이 정확히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는 지리정보 기록이 남아 있어 않으므로 양규의 정확한 동선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위치를 이동하면서 적을 공격하고, 싸웠다 하면 모두 승리해 포로로 끌려가던 수많은 백성들을 구해냈습니다.
한 달 동안 7번 전투를 벌여 1개의 성을 탈환하고 대략 1만 명에 달하는 적을 죽였으며, 포로로 끌려가던 3만 명에 달하는 고려백성을 구출하였습니다. 이 모든 업적이 불과 1,700명만 이끌고 이룬 성과였습니다. 즉, 양규 장군은 병력이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 유리하게 적과 맞설 수 있는 게릴라 식 유격전을 통해 큰 전공을 세운 것입니다.
4) 게릴라식 유격전으로 거란에게 두려움을 준 양규
게릴라 식 유격전을 통해 메인 전투에서도 승리하였음에도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기억을 거란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철수하는 거란군 입장에서는 양규 군이 몇 명인지도, 어디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며, 전쟁의 승패를 떠나 대부분의 거란군이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애초에 갑자기 성종이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났습니다. 양규는 거란군이 철수하는 길목마다 나타나며 유격전을 펼쳤는데, 하필 그때 공격했던 길목인 애전이 바로 거란군 본대의 주요 철수로였던 것입니다.
거란 성종이 이끄는 본대의 규모는 기록에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침공군의 본대였으니, 적어도 수만 명 이상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그렇게 1,700명과 수만 명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화살이 다 떨어질 정도로 처절하게 분투하던 고려군은 전멸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의 생존자가 있다는 기록은 없으며, 극한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당당하게 싸웠고 고려의 기개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전투였습니다.
그렇게 고려 최고의 유격대장 양규 장군은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용감한 부하들과 명예로이 전사했습니다. 양규는 비록 전사했지만 거란의 2차 침공 기간 동안 그가 남긴 위협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이는 거란이 3차 침공 당시 대규모 원정군이 아니라 유격전에 대응하기 수월한 기동성이 좋은 10만 명의 정예기병만으로 쳐들어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3차 침입은 오히려 고려가 평양에서 거란군을 압살 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습니다.
통주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주력군이 소멸된 고려는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양규는 극한의 불리함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나라를 지킨다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고려사의 기록이 큰 흐름 위주로 서술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정황에 대한 묘사가 없어 양규의 자세한 활약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디테일을 알 수 없다고 해도 요약된 업적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위협을 남긴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양규 장군의 결사항전으로 고려는 인구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거란의 3차 침공에 대응할 수 있는 국력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며
지금까지 고려거란전쟁을 토대로 살펴본 흥화진 전투와 양규 장군의 이야기를 적어보았습니다. 양규 장군의 활약이 어떻게 그려지게 될지, 그리고 거란으로부터 고려를 지키는 모습들이 어떻게 표현될지 너무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대작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본방사수를 통해 재미있게 즐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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